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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볼/셰어하우스 : 우린 우주에 산다

고3의 뻘짓거리: 19세 여고생

안녕하세요, 저는 사진잡지를 만드는 열아홉 살 성벼리입니다.

현재 고3 수험생이에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중요한 때에 뭘 하고 다니느냐고요? 물론 저도 학교, 학원, 집을 반복하는 고3 쭈구리입니다. 다만, 제 친구들과 저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들을 누군가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쌓여만 가는게 아까워서 이런 뻘짓거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가 촬영하고 출판한 얇은 잡지의 이름은 ‘19세 여고생’입니다. 단순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죠? 그걸 노렸습니다!

사진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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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군인이셔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게 재밌었어요. 경상도에서도 살다가, 충청도에서도 살다가, 중학교 때 서울로 왔어요. 그때 한창 DSLR 카메라가 유행했는데 그게 너무 멋있어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아빠에게 성적을 올리는 대가로 카메라를 사달라고 졸랐고, 결국 카메라를 손에 넣었죠.

그때 막 찍은 사진으로 블로그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러면서 점점 더 사진이 좋아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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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우연히 학교 앞에서 나눠주는 휴지를 받았는데 거기서 사진학원 광고 문구를 봤어요. 그때 처음으로 사진을 배우고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엄마에게 사진과를 갈려면 사진학원을 가야 된다고 조금 거짓말을 보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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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성벼리입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요

사진학원에는 정말 사진을 잘 찍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 친구들에 비해 제 사진이 너무 작게 느껴졌어요. 입시용 사진은 주제가 명확해야 하는데, 저는 일상을 촬영하는 게 더 재밌었어요. 입시용 사진을 준비하면서도 일상 사진은 계속 찍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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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기의 풍경

그런데 바빠서 블로그를 못하니까 그 사진들을 보여줄 데가 전혀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이 사진들은 버려지거나 사라져버릴 거라고. 그게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책을 만들자고 생각하게 됐죠.

그냥 고딩의 사진일 뿐인데

딱 20부만 만들어서 마켓에 나갔어요.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아닌 고딩의 사진을 언니, 오빠, 아저씨들이 사갔어요. 서점에서 살 수 없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많았어요. 너무 신기했고 기분이 좋았어요.

책을 좀 더 만들어 작은 서점 몇 군데에 입고하게 됐는데 어이없게도 품절되면서 재입고 신청이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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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있는 앵두나무에요. 선생님들이 농약쳤다고 먹지 말라고 하는데 저희들은 그냥 대충 씻고 막 먹어요. 엄청 맛있거든요.

제 사진을 보고 섹슈얼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사진 속 주인공들은 학교에서 맨날 보는 친한 친구들이라 저는 그런 느낌을 전혀 못 받는데 의외였어요. 그래서 그런가. 주요 구매층이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남성분들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20대 언니들이 제일 많을 줄 알았거든요.

생각 노트

저는 볕이 예쁘게 들어오는 곳을 좋아해요. 학교에서 봐두었던 예쁜 장소나 계절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버스에 빛이 잘 들어오는지 그런 것들을 저만의 노트에 적어놔요. 친구에게 받은 쪽지를 붙여 놓기도 하고요. 말이 되게 예쁘고 글씨가 되게 예쁜 거 줄 때 간직하고 싶어서요. 새벽에 떠오른 생각들도 적어요. 아침에 읽어보면 오그라들긴하지만요. 두 번째 책의 주제도 이 노트에서 찾아냈어요. 주제를 정하고 다음날 보니 또 오그라들었지만 그걸로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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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노트

내게 너무 예쁜 것들

저는 제 눈에 예뻐보이는 것들을 사진에 담아요. 손톱을 하도 물어뜯어서 없어져 버린 친구의 손톱이 예뻐보이고, 치아 교정을 한 친구의 입매가 예뻐보이고, 앵두를 먹다가 뭔가를 잔뜩 묻힌 입가가 예뻐보여요. 친구들의 눈이 안보이게 프레이밍하는 이유도 그게 예뻐보이고 신비로워 보이기 때문이예요. 아, 그리고 귀! 저는 귀가 너무 좋아요. 그래서 짝꿍의 귀만 찍은 사진도 있어요.

친구 그리고 미성숙함

사진 속 주인공들은 모두 친한 친구들이에요. 그 친구들은 저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워요. 저를 믿고 맡기니까. 제 사진에서는 모델과 저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양치질하는 사진인데 그 이유는 단순해요. 그 친구가 저랑 제일 친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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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은 모두 제 친구들이에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제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 얼굴이 제일 예쁘니까요.

저도 고2까지는 꾸미는 걸 굉장히 좋아했는데 고3이 된 어느날 갑자기 친구들의 맨얼굴이 너무 예뻐보였어요. 지금 이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확 와닿았어요. 그동안 어른 흉내 낸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그래도 고3때 그걸 알게 되서 다행이예요. 미성숙한 우리들의 순간을 담은 이 사진집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2호의 주제도 미성숙함이예요. 이제 스무살이 되기까지 다섯 달이 남았어요. 그 전까지 2호와 3호 그리고 좀 더 두꺼운 책을 만들 거예요.

엄청 어마어마한 일!

고3인데 책 만든다고 엄마, 아빠께 손 벌리기가 뭣해서 텀블벅에 프로젝트를 올렸어요. 그런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저를 전혀 모르는 분들이 제 사진만 보고 후원을 해주시는 거예요. 첫 후원자가 3만원을 후원해 주셨는데 3만원이면 정말 큰 돈이잖아요. 하루에 몇 시간씩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잖아요.

딱 2호 제작비용으로 40만원을 목표액으로 올렸는데 마감 일주일 전에 160만원이 넘었어요. 백 만원이 넘어가니까 무섭더라고요. 전 이런 돈,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거든요. 더 이상 안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더 바라는 건 욕심이에요.

저를 이렇게 믿어주신 분들 실망시키지 않도록 2호 책을 잘 완성하고 싶어요.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예요. 아, 수능은 잘 봤으면 좋겠어요. 진짜 그게 전부예요. 이런 관심과 사랑을 받다니… 정말 과분하고 행복해요.

언제 또 이런 날이 올까요?